불충의 나날

불충의 나날(4) / 즐거웠던 SB3 반 프레쉬맨 시절

신천대로 2017. 2. 20. 19:07

 

 

겨우 턱걸이 합격한 성적으로는

유학의 여정을 계속추진하는데 더욱 회의감만 들었으나

일단 합격은 했으므로

문수씨와 짝지가 되어 문수씨 친구의 소개로 하숙방을 구하고

대학에 등록을 하면서 책을 사고 교복을 맞춰입고

한달치 하숙방비를 지불하고 나니까 부산에서 가져온 돈이 바닥이 났지만

 

생계와 직결된 수학 과외교사, 아르바이트 자리가 턱 구해지고 나니까

내 앞에는

지금 회고해 보아도

내 일생에 있어 가장 아름다왔던, 환희에 찬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멍

 

 


 

1)어깨에 공산당 마크 견장이 큼지막하게 붙어있는 교복을 입고 서울 시내로 나갔다가

우리는 유명 연예인이 된 줄로 착각을 할 정도의 부러운 시선들을 받았다. 으~~쓱 ㅎ

 

당시는 가난했던 시절이라 등록금이 싼 국립대학에 우수한 학생들이 몰렸기도 하지만

연고대를 비롯한 유명 사립대학도 학교 재정을 위하여 문교부 정식 인가가 나지않은 학생들을 대거 입학시켜

사립대학 전체 학생들 질을 떨어뜨리던 시절이다 보니

무조건 서울소재 대학들이 인기 있는 지금과는 달리

지방에 있더라도

국립대학 학생들이 지금 보다 월등히 각광을 받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2)특히나 나는 공대 학생이 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경제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상대와 공대가 인기절정에 있었고

카이스트나 포항공대가 생기기 전이라

명실공히 서울공대만이 우리나라 이공계의 정상에 있었다보니

해외 유학장학금도 서울공대생들한테 집중적으로 배정되고 있었다.

 

물론 도에서 지원되는 장학금을 받고는 있었지만

같은 서울대학생인데도

문학부 문수씨가 아르바이트 자리를 못 구하여 고전하고 있을 때

난 신문광고 글 두줄만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바리바리 올 정도였으니

장안에서 서울공대생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3)턱걸이로 합격했기 때문에

난 전자공학을 공부하러 도미유학을 갈수 있는 또다른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합격한 공업교육학과는

2학년때 세부 전공이 결정되는데

그기에 전자공학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미유학을 가서 박사코스를 밟는다 함은 결국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니

공업교육학과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이

대학교수가 되기 위하여 도미유학을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었고

실제로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해외 유학파 교수님들 중엔 서울공대 공업교육학과 출신들이

자주 눈에 띄곤 한다.

 

즉 입학시험에서

2개월간 방황을 했어도

수학시험을 무난히 쳤다면 2지망 학과에는 합격했겠지만

그러면 영영 전자공학을 공부할 기회가 없어 졌을 것인데

모험을 하다가 수학시험을 망쳐서 턱걸이로 합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초교시절부터 그리던 그 전자공학을 공부할

새로운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전자공학과 합격을 코앞에 두고

방황한 것은 조금 꺼림직 하지만

멋들어진 아르바이트 자리를 쉽게 구해서 경제문제를 가볍게 해결한

나는

부산을 떠나올 때 계획데로

전자공학 도미 유학의 여정에 아주 순조롭게 진입을 한 것이었다.

 

 

 

 

 

경인지방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서울대학이

관악산 기슭에 명실상부한 서울대학교 관악캠프스 플랜이 잡히면서

우리기수 신입생 부터 교양과정부 만이라도 몽땅 한데 모아 교육을 시키고자, 서울 변두리 라서 부지 여유가 많았던,

노원구 공릉동의 서울공대 부지에 임시로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캠프스를 급히 지었고

수십대의 스쿨 버스가 청량리 역에서 출발하여 등교하는 신입생들을 실어 날랐다.

 

SB3 반은

교양과정부 소속 공대 1학년 중에서

제2외국어를 불어로 택한 학생들로 반이 편성되었는데

건축공학과 학생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반 대표로 경기고 나온 급우가 선출되고

부 대표로 대구의 경북대사대 부속고등학교 나온 급우가 선출되었다.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교양과정부 만이라도 종합대학의 위용을 갖춘데 고무된 대학당국이

푸르런 꿈을 안고 

서울대학을 세계속의 일류대학으로 만들고자

혹독하게 학업을 강행군 시키는 바람에

우리들은 학과 진도에 따라가느라고 진땀을 흘려야 했고

따라서 쉬는 시간에도 책을 손에서 놓을 틈이 없었는데

난 초교때 부터 시골 유선방송 스피커 앞에서 공부를 하던 습관때문인지

수업대기실의 그 시끄러운 카페 락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면 

책이 머리에 더 잘들어오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

누가 가르쳐 주지않고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대학,   그래서, 자력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혼자서는 한계가 있어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느라고 방과후 끼리끼리 모이는 스타디 그룹이 자동으로 생기기 시작했다.

 

가장 숫자가 많았을 경기고 출신 급우들은

지들끼리 어울려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어서 그런지

우리들과 아예 인사도 주고 받지 않을 정도로 도도한것 같기도 하고

공부밖에 모르는 인간미가 결려된 괴짜들로 봤는데

미팅에 나가 여학생들한테는 그렇게 친절한 모습들을 보고  내가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볍대를 지원했다가 몇번 미역국 먹고 할수 없이 공대 건축과로 눈높이를 낮추었다는

내 또래 경기고 노틀만이 우리들 하고 어울려 주었다.

 

200명 이상씩 서울대생을 배출하는 지방명문고 출신들과도

우리들은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용산고 나 대전고 사대부고 등의 소수민족 출신들이

내 주위에 가까왔던 것으로 기억에  남는다.

 

나는 처음에 아무도 어울려 주지 않아서 정말 왕따의 설움을 깊이 느껴야 했다.

공고 출신에다가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저렇게 몇년 재수의 만학을 했는데도

겨우 공업교육학과에 턱걸이로 합격했을 것이니

형, 형 하면서 친해져봐야 배울것은 하나도 없고, 리포트나 빌려달라고 귀찮게 할까봐 모두가 나를 피했다.

 

특히나 수업첫날 부터

영문으로 된 원서로 바로 밀어 붙이는 물리학은

영문에 약한 나를 완전 초토화시켰는데

한양공대생들이 사용하는 번역판 한글교재를 누가 카피해와서

지들 끼리는 돌려 보면서 나를 왕따 시킬때는 내가 무슨 배짱으로

저 이기적인 전국 명문고 출신들을 재끼고 도미유학의 꿈을 꾸었는 지 의안이 벙벙할 정도였다.

 

근데 물리학 교수님은 리포트 제출하는 것은 생략하고 대신

매 수업시간마다 전 시간 진도 나간데 대한 시험을 치고 다음 시간에 점수를 공개 했는 데

1개월 만에 내가 톱크라스로 치고 나가자

나도 놀랐지만 그 때부터

나에게 리포트도 빌려주며, 나를 따르는 손아래 급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입생들 끼리 낯이 조금씩 익어가자

공식적인 대표 부대표를 떠나서

반에서 인기를  모으는 우리 소수민족 출신 실세들이 나타났는데

3수에다가 듬직한 인물로 인기를 모으던 대전고출신 대길 씨와

출신고를 밝히지 않던 안동출신  유한일 손아래 급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안동 향토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있다는 재료공학과 유한일 군을 우리는 유한양행이라 불렀는데

태능 숲에서 교련훈련을 할 때

쉬는 시간을 이용한  막간에 유창한 언변으로 그는 우리 SB3 반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했는데

나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어주었다

 

체육시간이면 우리 모교 출신인 체육과 교수님은

우릴  태능선수촌 풀장에 가끔 데리고 가서 수영연습을 시켰는데

내가 물에 빠진줄 알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는

대전고 대길씨와 내가 다이빙대 높이 올라갔다가 발각되어 쪽팔리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 때

경기고 노틀 또래는

이화여대생인 여자친구를 풀장에 불러내어

수영복입은 늘씬한 여친의 몸매를 먼빛으로 우리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스타디 그룹에서

내가 조금 돋보인 것은 대길씨 힘도 컸는데

대길씨가 나의 하숙방에 놀러왔다가

짝지 문수씨와 같이 어울려 보고는 문수씨의 인품에 얼마나 매료 되었는지

 

광주일고출신의

대단히 멋있는 친구와 짝지가 되어 하숙을 같이 하고 있더라고

나를 스타디 그룹에 소개하는 바람에

내가 좀 으쓱하게 되었는데

모름지기 친구를 사귀어도 잘 생긴 친구를 사귀어야 되는 모양이었다. ㅋㅋ

 

 

우리들 국어 담당 교수님은 황동규 시인이었는데

소나기를 지은 황순원님 아들로서 분가하여 신혼생활을 하고 계셨다.

교양과정부 합동으로

시내 명륜동(?) 대학본관 대 강당에서 문리대 교수님들의 교양강좌가 자주 있었는데

교수님이 강의를 하시면 앞에서 조교들이 일일이 녹음하던 광경도 특이했지만

거창하게 웅변조가 아니라도 철학이 담긴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논리 정연하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이

역시 대 석학 답다는 존경심이 저절로 울어 나왔다.

 

어느 영문학 교수님이

역시 명 강의를 하셨는데 말미에

서울대학 전체 영어 영문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한 제자 이야기를 하셨을 때

국내외 영문학계에서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한

우리들은 지금 그 제자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물었고

교수님으로 부터

서울 모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에에~~~~!"

하는 탄식어린 야유가 터져 나오자

 

"왜?  고교 교사가 어때서??"

하시며 어리둥절 하시던 교수님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ㅋㅋ

 

 

 

 

 

 

 

 

국립 서울대학교 의 ㄱ, ㅅ, ㄷ  을 형상화 시킨 서울대학교 뱃지,  우리는 공산당 뱃지라고 불렀다. 속의 영문 베리럭스테스미아는 문학부 문수씨 해석으로는 "진리는 어디로" 라는 뜻이라 했다.

1946년 8월 22일에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으로써  탄생한 서울대학교는 우리가 입학하기 전 까지는 말만 종합대학교 이지 실제는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일제 시대부터 잔존했던, 서울(경인지방)에 산재하는 국, 공립 고등교육기관을 행정상(서류상) 만으로 같은 대학이라고 엮어놓은 데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대학이 같이 모여서 벌리는 행사에는 연세대 고려대를 선두로 사립대학이 판을 치는데 반하여 서울대학교는 어디에 있는 지 얼굴도 못 내밀었다. 그러다가 관악산 기슭에 명실상부한 서울대학교 관악캠프스 플랜이 잡히면서 우리기수 신입생 부터 교양과정부 만이라도 몽땅 한데 모아 교육을 시키고자, 서울 변두리 라서 부지 여유가 많았던,  노원구 공릉동의  서울공대 부지에 임시로 서울대학교 교양과정부 캠프스를 급히 지었고 수십대의 스쿨 버스가 청량리 역에서 출발하여 등교하는 신입생들을 실어 날랐다.

우리 1학년이 단체로 뭄직이자 곳곳에서 서울대학교도 이런적이 있었나 하는  새바람을 불러 이르켰고 그래서 공산당 마크 견장이 붙은 교복을  입은 우리들은 서울대학을 대표하는 응원단(엉성한 ㅋ)을 중심으로 뭉쳐다니며 우리도 종합대학교 학생이란 것을 확인시키러 동분서주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