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충의 나날

불충의 나날(1) / 미국 유학귀신 한테 홀려서 진퇴 양난에 빠진 부산대학 시절

신천대로 2016. 7. 27.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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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 년도 부산대 무지개 문



불어과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은 대부분 여학생들이었고
남학생은 나 포함 달랑 두넘 뿐이었다.




근데
이 두넘이 좀 잼있게 여학생들하고 어울려 주지는 않고 수업시간에 뒷자리에서 엎드려 노상 잠만 꼴꼴자고 있었다.
그러나 불어과 교수님은
남학생도 수강신청을 해 준것이 고마운지 가만히 다가와서, 자도 괜찮다면서
출석만 빠지지 말아달라고 다독거려 주고 갔다.


실업계 출신이라 독어를 접해보지 못해서
제2 외국어를 여학생들이 선호하는 불어를 선택하긴 했지만
나는 진퇴양난에 몰려 청일점의 희소가치를 즐길 계제가 못되었다.
그것은 해운대 누나에게 위탁할 유학자금을 마련하기위하여
입대 연기를 위한 목적으로 과를 가리지 않고 등록금이 싸면서 평소실력으로 간단히 합격할 수 있는
부산대 물리학과에 입학만 해 놓았는데
누나의 산통이 깨어지는 바람에
도미 유학의 길이 막혀버려서
부산대 물리학과라도 다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 지 진퇴양난에 처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내가 자꾸 수업을 빼먹고 농땡이 치는 것을 보다못한
물리과 주임교수인 노동택교수님은
날 불러 무슨 문제가 있으면 자기가 적극 밀어주겠다는 개인면담까지 해 주셨다.








"공부 잘하는 놈들은 기껏 접장질 밖에 못한다"
는 말이 있었다.


집이 부유하고 공부를 잘해서 대학을 나와봐야
판검사가 못되면 기껏 중등 교사 자리밖에 진로가 없던 시절에 나온 이야긴데


박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경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대우 그룹을 비롯하여 상상을 초월하게 대졸 고임금자를 뽑는 대 기업들이 나타나서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는
상과 대학과 공과 대학의 입시 컷트라인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기껏 중등교사 밖에 진로가 없는
일반 문리대나 사범대학과 엄청나게 실력차이가 벌어져 버렸다.


따라서
우리집 형편에 대학을 갈려면 다시 제수를 해서라도 공대를 들어가야 하는데
도미 유학귀신한테 한번 홀린 내 맘으로선 다시 제수하여
지방대학공대를 들어 간다는 것이,
그리고
밤잠 안자고 일하여 대졸 자격을 따서 또다시 취직이나 해야된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려 공부가 영 손에 안잡히는 것이었다.


그때
고향을 다니러 갔다가
창녕읍에서 중학교 동기 성낙곤 급우를 만났는데
성낙곤급우는 당시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야~야
니가 벌어 대학다닌다고 공장에서 밤잠 안자고 그 고생하지 말고
서울 온나
니 머리 같으면 그 고생 안하고도 얼마든지 대학다닐 수 있는 길들이 서울엔 많다"
하는 희망적인 말 한마디를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누나의 산통이 깨어지는 바람에 다시 가난한 집 아들로 내려 앉았다 해도
서울에 가면 길이 있다는데......
그래
"머슴아가 뜻을 세워 칼을 한번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한번 찔러나보고  다시 칼집에 칼을 꽂아야 하는 거라구.....ㅋㅋ"


그래서
내가 농땡이 치면 같이 농땡이를 쳐 주던 의리파 청일점 짝지한테
더 이상 날 따르지 말고 혼자 남아 불어수강을 열심히 받아라 하고는 난 서울로 튈 준비를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집엣돈 한푼 안들이고 내가 벌어 대학을 간다지만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맡고 좋은데 취직해서
이제 좀 편해지나
기대가 커셨던 부모님한테
돈 한푼 드리지 아니하고 몽땅 유학자금 모으는데 투입했다가
부모형제들 한테 크게 도움이 될것 같지않은
유학의 여정으로 서울로 튀는 것이 너무나 죄스러웠는데


어머니는 서울에서 덮고 잘 이불 한채를 고이 꾸며서는
나에게 주시고
지폐몇장을 손에 쥐어 주시면서
이건 동생이
그 동안 부산에서 번 돈인데 형 서울 여비하라고 주는 거란다 하시는 것이었다.

 

 

 

 

"수야 우리 집안도 이제 잘 사는 날이 오는 것 같다"

하시면서

4부두 발전함에 취직하여 나의 생활이 궤도에 오르는 것을 본 해운대 누나가

산통에 가입하라고 나에게 접근하여 왔을 때

 

나는 조목조목 경계의 토를 달았으나 누나는 절대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운영하신다면서

그 서글서글한 설변으로 나에게 환상을 심어주느라고 제시한 산통의 수익율에

나는 이런 희한하게 간단히 큰돈 버는 길이 있다는데 대하여 놀라움을 넘어서서

 

뭐라고 표현하기 곤란한 묘한 허무감을 느꼈다.

 

그것은 가난을 벗어나고자 뼈빠지게 일하는 모든 분들이 바보처럼 보였고

당시 공고를 졸업하고 한전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므로서

내가 벌어

주간 국립대인 부산공대를 다닐 수 있게된 나의 쾌거를 일시에 아주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다. 

 

 

누나가 환상을 심어주는 바람에

대학 진학을 2년만 미루고

2년동안 다달이 번돈을 모두 해운대 누나한테  위탁을 하면

2년 후에는 해운대 누나가 다달이 지불하여 주는 그 이자만으로

맘껏 하고 싶은 공부를 언제 까지나 계속 할 수 있는 부잣집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니

 

한전에서 밤에 고생하면서 일하여 낮에 공과대학을 나오고 그래서

대졸 자격으로 회사에 입사해서 승진을 해봐야

별로 끗발도 대단치 않고 지고한 명예가 따를 것 같지도 않으며

기껏 돈몇푼 더 받을 뿐인 회사에 다시 들어간다는 꿈이 아무 의미가 없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구세군 교회에서,  나와 가까와 질뻔했던 중3 여학생이 경남여고에 합격하는 바람에

취직걱정 밖에 못하는

공고생인 내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도망칠 정도로 구차하게 산 내가 싫어진 것이었다.

 

 

우리집이 부잣집이 된 것으로 장미빛 환상에 들뜬 나는

가난 때문에 위축된 나의 꿈을

내 맘이 움직이는 데로 무한대로 풀어 버렸다

 

어려서 부터 

공직 분야는 나의 관심 밖이라.....

결국 나의 꿈은

서울공대를 거쳐 도미유학을 가서 내가 초딩때 부터 그렇게도 그리던

벨연구소 같은 곳에서 전자공학 트랜지스터를 맘껏 공부하는 쪽으로 안착이 되었다.

 

누나 득분에 내가 부잣집 아들과 똑 같이 된다해도

우선은

부모님 승낙을 받아야 했다.

고등학교 까지 시켜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대학은 내가 벌어 마칠테니까 대학졸업할 때 까지 부모님이 좀 기댜려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했더니

아버지가 흔쾌히 승낙을 하셨고

결혼한지 1년 남짓 된 형님이

 

"대학까지 시켜줄 형편은 안되지만 

네 안 벌어주어도 우리 사는데 걱정없으니

네 하고싶은데로 공부를 높이 해봐라"

하며 아버지를 거들어 주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형님이

눈물이 나도록 너무 너무 고마우셨다.

근데

너무 쉽게 승낙 관문을 통과하고 나니까 슬슬 불안해 지기 시작하는 데......

혹시

증조부님이 개간하신 한터들판을 송두리째 일제한테 빼앗겨버린 한을 풀고자

내가 판사나 검사가 되기위하여 공부를 높이할려는 것으로 알고 계시지나 않을까?

난 내 하고싶은 전자공학 트랜지스터 공부하러 미국 갈려는데........ㅜㅜ

 

부모님 승낙을 필한 후

이제는 나의 멘토 초등학교 시절 은사 하제일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텐데....."

하시면서도

제자가 높은 꿈을 갖는 것이 대견한지 나의 꿈을 꺽지는 않으시고

군 입대 연기문제를 상의하도록

군 병사계에 계신 선생님 친구를 소개해 주셨다.

 

창녕군 병사계 하선생님의 친구분,

물론 지금 돌아가시고 안계시지만

창녕군에서 또 한명의 인재를 탄생시키고자 당신의 공무원 신분을 넘어서서

세세하게 군대를 연기시키는 편법까지 친절하게 조언을 해주신 너무 너무 고마우신 분이었다.

그 분의 여러 조언 중에서 난 다른분들한테 누를 끼치지 않으면서

경비가 제일 적게드는 부산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병역 연기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의 부산대학 문리대  물리학과 입학은

최소의 경비로 병역만을 연기할 목적으로 입학한 것이었는데

창녕군 국회의원을 지낸 노기태 초교 선배도 당시 부산상대에 같이 입학하였고

중학교 동기 노창환 급우도 부산공대 전기과에 같이 입학하였다.

 

 

 

 

 

 

 

 

 

도미 유학의 열정에 들떴던 시절

나를 사로 잡았던 팝송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아마도 내 기억에 샌프란시스코가 더 와 닿았던 것은중학교 시절 앞집 손점숙 선배한테서 빌려 봤던 책"김찬삼의 세계일주 무전여행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그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샌프란시스코의 관문골든게이트(금문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매혹적인 자살터라고^^석양을 끼고 태평양으로 부터 저녘안개가고양이 앞발처럼 야금야금 금문교로 다가오면금문교 위에 선 자살자 들은 저녘노을을 바라보며 행복하게다리아래로 다이빙 한단다.그러면 수십길 아래 파도가 거친 바다에 추락하자 마자 거의 100프로 죽음에 성공 한단다.혹시 실패하더라도 다리아래에는 상어떼들이 항상 대기하고있기 때문에완전 100프로 뒷처리까지 깨끗이 정리가 된다고.실례로 인근의 백만장자 은행가가 자가용 비행기로1년동안이나 자살터를 물색하기 위하여 세계를 누볐지만결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에서 멋지게 다이빙하여 그의 숙원을 풀었다 한다. ㅋ

 

 

 

 

 

 

후일 부산대학 학생주임을 역임했던 노동택교수님은 나의 고교 시절 학생주임을 역임하시다가 자신의 모교였던 부산대학에 교수로 영전하신 분인데 고교시절에 우리과 수업을 담당하시진 않았지만 학생회 일때문에 몇번 김명제와 함께 나와 개인 상담을 한 인연이 있었다. 학생회장 선거때 우리반에서 회장에 출마한 박주관 급우가 떨어지는 바람에서 였던지 염직과에서 당선된 박병호 학생회장은 간부들 인선에 우리과를 배제 시켜버렸다. 당시 나와 함께 대의원으로 활약하던 김명제가 발끈 하는 바람에 학생회장과 학생주임을 맡고 계시던 노동택 선생님이 우리를 무마하느라고 저녁도 사고 그러셨는데 대학 강의실에서 만난 노동택 교수님과 나는 무척 반가왔고 그래서 인지 물리과 톱으로 장학금 받은 이야기며 부산대 물리학과도 고체 물리학 분야에는 우리나라 정상이라는 등의 이야기로 부산대학에 맘이 떠난 나를 붙잡기위하여 애를 써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