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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등록을 하고 하숙방비를 지불하고 나니까 가져간 돈이 다 떨어졌다.
학자금을 어디 하나 지원받을 수 없는 현실속에 친구 성낙곤이 말만 믿고 무작정 상경한 자신이 한심한 생각이 들면서 좋은 직장도 잃고 대학교도 중도 포기하는 미아가 되지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지만 동아일보에 가서 두줄 짜리 아르바이트 광고를 내었더니 나를 찾는 전화가 바리바리로 오는데........이렇게 좋을 수가 ㅋㅋ ㅋ
명문고교 고3을 지도하는 것이 제일 수익이 좋다고 해서 비교적 하숙집에서 가까운 곳 동대문구에 사는 경복고 3학년을 맡기로 했다.
지방에서 공장을 하는 부모가 명문 고등학교 들어간 아들의 서울 유학을 위하여 동대문 부근에 아파트를 하나 사놓고 부모가 교대로 와서 자녀의 밥을 해주고 있었다.
하루 2시간씩 수학만 가르쳐 주고 월 1만 5천원을 받기로 했는데 당시 서울공대 한학기등록금이 2만원 이었고 한달 하숙비가 9천원 이었으며 미팅 회비가 500원 이었으니까 풍족하진 않지만 고3 한명만 가르쳐도 내가 벌어 대학을 다니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마포구 한강둑에 있는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놀러를 가서 고등학교 졸업하고 한전에 같이 입사한 동기들을 만났는데 3년된 그들 월급이 2만원 이었다. 교대수당 다 포함된 것이니 실제 본봉은 나와 같이 1만 5천원 정도 였으리라 (당시 일반 대졸 초봉도 1만 5천원 정도)
마포구에 있는 당인리 발전소/ 현제 발전소는 지하로 들어가고 굴뚝이며 상부 구조물은 공원으로 조성된다한다.
여학생들 한테 인기가 많을 것이니 지들 한테도 좀 소개를 시켜주라면서 농담을 던지던 그들은 8시간 4조 3교대로 밤일도 해야 하지만 난 하루 2시간만 아르바이트해도 그들 만큼 버는데........ㅋㅋ
물론 그들은 보너스며 김장값등이 별도로 나오지만 나도 방학때 과외를 하나 더하면 양복도 사입을 돈이 나오고 그룹 과외 지도를 한다면 학생수에 따라 한달 수입은 예측을 불허할 것이었다......ㅋㅋ
현 싯가로 (당시 서울공대 한 학기 등록금이 2만원 한국전력 부장급 월급이 3만원 미만임을 감안) 시간당 5 만원에 해당하는 초 특급 고액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나니까 (월 50시간에 250만원 받는다 계산) 좋은 직장 버리고 서울로 튀었다는 비난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고
"야~야 니가 벌어 대학다닌다고 공장에서 밤잠 안자고 그 고생하지 말고 서울 온나 니 머리 같으면 그 고생 안하고도 얼마든지 대학다닐 수 있는 길들이 서울엔 많다"
고 소개한 중학교 동기 성낙곤이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하루 2시간 만으로 간단히 경제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난 이제 태평양을 넘어 도미유학의 길이 환히 열려오는 것 같은 희망이 부풀기 시작했다.
근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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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2개월째 월급을 받던 날
내가 가르치던 경복고 3년 학생이
아르바이트비 가 든 흰 봉투를 나에게 내밀면서
"선생님 내일 부터 오지 마세요
선생님한테 배우니까 시간낭비란 생각이 듭니다.
과외를 처음 가르쳐서 잘 모르신 것 같은데
우리 고3은 선생님 수업외에 학원도 가야하고 엄청 바쁘거등요
선생님과 문제 푸는 것 연구할 시간이 없어요
고3 과외 계속 하시려면
미리 집에서 문제를 풀어 보고 와서
과외시간에는, 학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문제를 막 풀어가서 진도를 빨리 나가세요"
하는 것이었다.
정말
촌각을 쪼개어 치열하게 승부를 다투는
명문고등학교 고 3의 절박함이 예리하게 느껴졌고
그 고3 이 내 뱉은
나에게 배우는 것이 시간낭비 라는 한마디에
어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벌컿게 달아오르는 내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도 못 들고 난 학생의 아파트에서 봉투만 들고 도망쳐 나왔다.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근무하던 회사에서 실력없다고
해고 당하여 쫓겨난 것이었다.
내가 테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사회의 매정함 이랄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는 않을 것이란 하제일 선생님 말씀이 새삼 떠오르면서
충격으로 정신이 나간 나는
촛점잃은 시선, 멍한 모습으로
귀가 버스를 탓는데
설상 가상으로
이번에는 나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쓰리꾼이 따라 붙은 것이었다.
서울대학 합격 기념으로
부민동 막내 누나가 나에게 사준 일제 시티즌 손목시계가
디자인이 특이하여 멀리서 보면 꼭 고급 롤렉스 손목시계처럼 보였는데
버스 출발 직전에 누가 나의 그 손목시계를 나꿔 채가고
옆에 사람이
"저놈 잡아라 학생 손목시계를 훔쳐서 저리로 달아나네"
하는 고함 소리에
멍하니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버스에서 뛰어내려 도망가는 쓰리꾼을 찾으려 두리번 거리는 사이, 버스는 가버린 것이었다.
정말 서울은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눈앞에서 코를 베어가는 무서운 곳이었다.
갑자기 내 주위를 오가는 많은 서울 사람들이 무습게 느껴지면서
해고에 대한 허탈함과 더불어
세상이 문득 두려워 지기 시작했다.
술을 잘 못먹는 나지만
포도주를 한병 사가지고 하숙방에 들어가서
병째 통나팔을 불고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드러 누워버렸다.
그 날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쓰라린 하루였었다..
담날 다시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고는
서울대 합격했다고 나를 반겨주는 삼청동 독서실 사감실에서
하루 종일 전화를 기다렸지만
학기초가 아니라서 그런지 나에게 맞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연결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헛탕을 치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귀가 버스를 타기 위하여 터덜 터덜 걸어 가는데
아르바이트에 문제가 생기니까 당장 생계의 위협을 느껴서 그런지
시장기가 돌면서 배에서 쪼로록 소리가 났다
허기를 면하고자.
길가의 풀빵 장사를 찾아가
풀빵 100원 어치를 사서 게글 스럽게 먹어 치우고 있는데
풀빵장사 아주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학생이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쯧쯧쯧"
하고는
돈 안받을 테니까 그냥 먹고 가라면서
풀빵 200원 어치를 덤으로 내어 놓는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 하고
눈시울이 붉으지면서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서울은 눈앞에서 코를 베어가는 무서운 사람들만 있는 곳은 아니었고
비록 거리에서 풀빵을 팔고 있지만
배고픈 이웃을 챙길 여유를 가진
마음 따뜻한 서민들도 사는 훈훈한 곳이었다.
그 마음 따뜻한
풀빵장사 아주머니의 여유에 감동을 받아
난 며칠간의 악몽을 잊고
세상이 다시 밝아 보이기 시작했다.
배경음악
Battle Hymn of the Republic 은
찬송가로 불리어 지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미국 남북전쟁때 패전의 실의에 빠져 있던 북군에게 용기를 주어
북군을 승리하게 만든 용기와 희망을 주는 노래랍니다.
졸업도 하지 않은 대학 재학생이 2시간만 아르바이트 하여 대학교 졸업한 선배의 월급과 맞먹는 수입을 올리는 이 고액과외가 사회에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재학생의 고액과외는 사회가 허용을 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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