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야기

우리집은 명당자리 /기미마을 주변 수맥에 대한 기억

신천대로 2016. 4. 19. 11:08


 







       

       

       

      내가 태어날 당시 기미마을은 거의 초가집이었는데

      우리집은 기미마을 중간쯤에 있었다.

      안쪽 뒷집은

      넓은 안마당을 가진

      기풍있게 잘 지어진, 우리마을에 몇채 안되는

      기와집이었는데

      서재겸 바같 주인의 방 마루가 유난히 높은 것이 예사 한옥과는 아주 달랐다.


       

      그리고 안마당 끄터머리 쯤에는

      아주 깊고도 잘 축조된 우물이 하나 딸려 있었는데

      마을에 오래 살았던 분들의 이야기로는

      그 우물은 아주 깊기도 하지만 샘물이 펑펑 많이도 솟아올라서

      뒷집과 우리집 담벼락을 따라 땅속 깊이 축조된 엉기를 통하여

      마을 중간쯤에 있는 엉기 도랑, 빨래터로 춘하추동 흘러 나간다 했다.

       

      천수답 지대라서

      가뭄에 시달렸던 기미 마을로서는

      지하수가 평평솟는 곳은 명당자리라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자녀를 초등학교도 다 시키지 못할 정도로 빈촌이었던 기미 마을인데도

      그 우물 주위로 3이웃집에서는

      김원선배(감골댁), 노근수선배(평촌댁), 손점순선배(덤실댁), 손외식선배(두욱댁,초계댁),

      나(한터댁), 노휘석후배(태봉댁), 박준포후배(만촌댁,달미댁), 오석진후배(조동댁, ) 등

      고졸 이상의 고 학력자들을 소롯이 탄생시켰다.


      그래서

      창녕 중학교 시절

      뒷집의

      한해 위인 손외식선배가 쓰던 교과서를 내가 물려 받았고 

      안쪽 뒷집의

      한해 아래인 노휘석후배한테 내가 그 책을 물려 주었다.


      앞집의 덤실댁 

      두해 연배인 손점순선배는 독서광이었던 모양이었다.

      손점순 선배한테 내가 감명깊게 빌려봤던 책으로서

      1)검은별

      2)장발장(레미제라불)

      3)김찬삼씨의 세계일주 무전 여행기

      등이 기억에 남는데

      당시 국내 최고 베스트셀러였던 무전여행기는 정말 나에겐 감명 그 자체였다.


      창녕중학교 총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김원선배님은 형님의 초교 동창으로

      대구 수성경찰서 고위 간부로 제직하셨던 시절 내가 신세를 진일이 있고


      동생의 초교동창인 박준포후배는

      비행기(공군전투기?)를 몰고 기미마을 상공을 가끔

      선회하여 고향을 그리는 그의 마음을 고암면 하늘에 수놓기도 했었다.









      내가 철들 무렵

      석동(이방?) 어디에선가 로 부터

      그 우물이 딸린 기와집에,  태봉댁 노휘석후배 가족이 이사를 들어왔다.

      한문 학자이신 박준포후배의 할아버지와 더불어

      노휘석후배의 할아버지도 백발이 성성한 한문 학자 이셨다.

      멀리서 노 할아버지를 찾아온 문하생들이

      가끔은 앞집에서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우리 사랑채에 주무시기도 했는데

      그 분들 중에는 같은 광주노씨인 구암아제도 계셨다.

      구암아제는 창현이 형님과 달현이 형님의 부친으로

      나의 처가인 이방면 글방에 계신 나의 처오촌 숙부님이신데

      기와집과 사랑채의 인연은 결국 아버지가 강력히 나의 중매결혼을 원하신

      한 요인이 되었다.




      기미 마을에는

      이 우물 말고도 좋은 우물이 많았습니다.

      이글은 그냥 제가 태어난 이웃집에 대한 기억 이야기로만 국한하여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미(괴산)마을 주변 수맥에 대한 기억


1. 기미못 발원 샘

못안(고연정) 동네는 행정상으로 기미(괴산)마을 소속이었다.

감골못이 축조되기전 기미 들녘을 적시는 유일한 저수지 기미못,

그 기미못의 발원샘은 지하수가 거의 봇물 수준으로 펑펑 솟아 나오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갈미봉의 계곡물이 소내못(우천저수지)를 거쳐 땅속으로 스며들었다가 솟아나온 것으로 보여지며

못안 동네는 경남고교를 거처 서울공대 화공과를 나와 미국에 유학을 간 강정구선배의 동네다.


2. 우리뒷집 우물

기미 마을 중간에 있는 엉기도랑 빨래터에 춘하추동 흘러나오던 맑은 물의 발원 샘이라고

오래된 마을 어른이 어린나에게 설명해 주신 것으로 기억된다.


3. 찬샘이

기미마을 뒷 들녘에 맑은물이 땅에서 펑펑솟아나와 뒤 들녘을 흥건히 적셔주던 샘이었는데

물이 맑고도 차면서 샘이 얕으막하고도 넓어서

"봄 바람 기미 앞동산

여름한철 찬새미"

하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기미 사람들의 여름밤을 식혀주는 물놀이터로 사랑을 받았다.

 

낮에는 농사일에 지친 남정네들의 피로을 풀어주는 냉탕욕 샘이 되다가

밤에는 마을 아녀자들이 마음놓고 여름밤 피서를 즐기도록 마을 어른들이 보호를 해주지만

개구장이들은 발가벗고 목욕을 즐기는 아낙네들을 어둠속으로 훔쳐보다가 들켜서 혼쭐이 나기도 했다.


4. 기미 마을에서 만촌으로 내려가는 도로 가에

지하수가 펑펑솟아오르는 수량이 풍부한 웅뎅이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기미마을 주변으로 흐르는 지하수 수맥은

갈미봉과 달미에서 흘러내리는 중대천의 물이 지하로 스며든 수맥으로 볼 수 있어

가뭄이 연달아 닥치면 엉기도랑 빨래터까지 모두 말라버린다.

애타게 하늘만 쳐다보던 사람들은 더 큰 지하수 수맥을 찾아서

감골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대암 동네앞 토평천 바닥을 깊이파서 보를 만들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 봇물은

지대가 낮은 만촌들녘에는 도움이 되었자만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은 기미들녘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