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이야기

감골못 대 역사(役事)와 / 보릿고개가 힘들었던 유년 시절들 43

신천대로 2014. 12. 16.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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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ya - Amarantine

     

     

     

    6년 연배인 형아와 나는

    명절이면 감골재 너머 밀양에 계시는 외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것이

    연례 행사였는데

    집으로 돌아올 때는 청간 누나 집에 잠깐 들렸다가

    감골못 저수지 공사하느라고 여념이 없는 중장비에, 몰래 올라타고 내려오는 재미에 폭 빠지곤 했다.

     

     

    감골못 둑을 만들기 위하여 흙이 많은 감골재 기슭 야산 하나를 파헤치는데

    중장비가 야산을 훑으면서 전진하면

    재~~앵하는 소리를 우렁차게 내면서

    대패가 나무를 얇게 빚어내듯이

    장비의 칼날에 대패질 되는 산의 흙들은 대패질 되면서 바로 장비의 짐칸에 실리고

    짐칸이 가득히 차면 장비는 대패질을 그만두고 저 아래 계곡의 공사현장으로 이동하여

    대패질한 흙을 현장에 간단히 부리고는

    또다시 대패질하러 야산으로 올라가기를 반복하는데

    그 이동하는 장비의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를 못해서

    어린 우리도 약간만 뛰면 간단히 올라 탈 수 있는 것이었다.

     

    차가 귀해서 차를 타보지 못한 우리에겐

    장비가 워낙 길고도 거창해서 운전석에 앉은 기사아저씨가 미처 우리가 올라탄 것을 눈치 못 채는 것을 이용하여

    장비 뒤쪽에 올라타고 있으면 이거 이만저만 "호시"(재미)가 나는 것이 아니라

    먼 산길을 걷지 않고 장비를 타고 내려가는 멋이란 아주 신나는 것이었다.

     

     

     

      아스완 댐 / 사막의 이집트를 옥토로 만들다.

     

    둑 밑 기초공사를 할 때는 지하수도 새지 않도록 바닥암반까지 깊이 파기 때문에

    특히 수문 공사 현장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시퍼런 물이 입을 헤 벌리고

    이런 거창한 토목공사에는

    심청전에 나오는 고사처럼

    어디라 할 것 없이 공사의 안녕과 둑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어린 애를 저 물속에 어쩌구 하는 무시무시한 괴담이 우리를 오싹하게 만들었으며

     

    둑의 흙 속으로 물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둑을 쌓아가는 가운데 부분은 아주 미세하고도 찰진 흙을 부어 넣고

    망께라하는 기구를 사용하여 사람 힘으로 일일이 다져나가는데

    무겁고도 커다란 나무토막으로 된 망께 주위로 대여섯 사람이 둘러서서

     

    "~~♬"

    뭐라 뭐라 하며 조장 한사람이 선창을 하면, 후렴은 모두 합창으로

     

    "에헤라 망께야 !!"

    함과 동시에 무거운 망께를 함께 들어 올렸다가 쿵 하고 놓으면서

    찰흙을 다져가는 모습은

    어린 우리들의 호기심을 한없이 잡아끌었다.

     

    장비가 열악하던 시절에

    사람 힘만으로 피라미드를 건설했듯이

    감골못 둑을 쌓는데 지게로 일일이 흙을 져다 붙느라고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고 매일 지급되던 임금은

    당시 가난했던 우리나라에 구미 열강에서 지원했던 구호물자 밀가루로 지급되었다.

     

    계팔 부근에 옛적에 있었다는 나즈막한 저수지의 둑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댐 수준인 거창한 감골못 저수지 공사는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이집트 아스완댐에 비기는 우리 고장 최대의 역사였다.

     

    둑이 완성되고는

    수문을 통한 물은 계곡의 자연하천을 따라 흘러내리다가

    계팔 부근에서 또다시 지하수도 새지 않는 튼실한 취수용 잠수 보를 설치하곤

    거기서 부터 시작되어 20 리 길이나 가뭄에 찌든 우리 고장의 평야를 흥건히 적시기 위하여

    앞 야산들 중턱을 뚫어 거창한 수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수로가 고지대인 기미 동산 부근을 통과할 때가 제일 난 공사였나 분데

    현장에 늘려있는 공사자재를 지키기 위하여 지어진 숙직실에는

    밤이면 갈미봉에서 늑대들이 내려와 숙직실을 둘러싸고는 창문으로 콧구멍을 들이밀어서

    안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 간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수로의 급경사를 피하기 위하여 곳곳에 콘크리트로 낙차라는, 인공폭포와 웅뎅이를 만들었는데

    낙차는 한여름 우리 개구쟁이들 물놀이터로 인기를 끌어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있던 내가 낙차의 폭포수를 잘못 맞아 거의 기절상태로 정신을 잃은 추억을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우포늪의 젖줄 토평천,

    그 토평천의 발원지

    감골못이 건설되고 그의 물줄기는

    아스완

    댐이 사막의 나라 이집트를 옥토로 만들어 가듯이 기미 마을을 포함한 가뭄으로 버려진

    우리 고장 들판을 서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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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구덕운동장에서 시연된 망께 터다지기 공연

 

 

 

 

 

 

지금이나 옛날이나

우리나라 기후는

모내기 철에는 비가 잘 오지 않다가

모내기가 끝나고 논매기 철이 닥칠 때쯤 장마가 시작되어 비가 많이 온다.

 

감골못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모내기 철에 비가 귀하므로 산골짝 동네들은  

비록 농경지는 빈약할지라도 조금씩이나마 흘러내리는 골짜기 물을 모아 둔

소류지(못)를 이용하여

모내기를 제 때에 하지만

평야 한가운데 위치한 기미 마을에는 거의 천수답이라서 하늘만 쳐다보다가 모를 심지 못하면

논에다 밭곡식인 조를 심어 그나마 식량에 보태고자 하였다.

그러나 논에 심은 조가 자랄 때 쯤이면 이제는 장마가 들어

조 농사마저 수확을 못 하도록 기후가 훼방을 놓아 버리기 때문에

조 심은 논이 물에 잠긴 것을 보고는

어른들이

 

"가물어서 조지고 비가 많이 와 조져서 올해도 흉년이구나"

하고 탄식을 하시는 말씀들을 들은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이 기미 마을로 처음 이주했을 때만 해도

가뭄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거의 버리다 시피한 전답들이 많았다 했다

헐값으로 전답을 사모으기는 했지만 우리라고 수확을 제대로 할 수는 없어

곱장기로 춘궁을 넘기는 일이 자주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가뭄이 들면 춘궁을 넘기지 못하여

굶어서 죽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당시의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우리 집이 그래도 조금 낳았던 것은

겨울 농한기 때 아버지가 가마니를 짰기 때문이었으나

가뭄이 연달아 닥친 겨울에는 먹을 양식이나 들판에 늘린 쑥이나 나물도 없어

가축 먹이로 쌓아두었던, 콩잎 말린 것을 썰어 넣고 끓인 소금물을 먹고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있었던 것은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고

지금이나 그때나 입이 짧은 내가 동생 아기의 이유식을 조금 나누어 먹는 것 외에는

콩잎 죽은 도저히 먹어내지를 못하고 쫄쫄 굶고 있으니까

밖에서 아버지가 가만히 손짓으로 나만 불러내어서는 부엌에 데려가셔서

가마니 짜는 아버지만 드시라고 어머니가 우리 몰래 차려드린 아버지 밥상의 그 귀한 조비밥을

나누어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조가 섞여 노랗게 보이는 밥을 보면 입에 침이 가득 고이며 그렇게나 흥분하게 된다.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러

오촌들이 사시는 밀양 명례리에 가셨다가 들판에서 수확하고 버려진 무우며 배추 

시래기를 줏어 모아 한 짐 지고 100릿길을 걸어 걸어 한밤중에 집에 오시기도 했는데

가축이나 먹는 말린 콩잎으로 연명하기도 했던 우리에게 사람이 먹는 시래기로 만든 죽이야 말로 특식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오촌댁 명례리에 가보고는

나는 깜짝 놀랐다.

춘하추동으로 흐르는 낙동강 물을 퍼 올려 대 수로를 따라 언제나 물이 찰찰 흘러넘치던 그 넓은 들녘은

하늘만 쳐다보며 탄식만 하던 기미 마을에서는 상상도 못 할 별천지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한사코 가뭄에 찌든 기미 마을을 떠나 오촌들이 사시는 명례리로 가자고 그렇게나 주장했나 부다. 

 

감골못 공사가 시작되고 수년간 둑을 쌓고 수로를 만드느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생겼고

그날그날 임금으로 지급된 밀가루는 가뭄의 기아에서 굶주리던 우리 지방 사람들에겐

보릿고개를 무사히 넘기는 단비가 되었다.

 

감골못 수로 건설이 끝나서 수로에 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모내기를 제때에 할 수 있게 된 우리 기미 마을에도 서서히 풍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어느 날

 

"이제 오늘부터 밥만 먹게 해주겠다"

하고 선포를 하자

 

발가벗고 방 안에 있던  형아와 나는 춤을 추었다.

형아가 좋아서 춤을 추면 나도 덩달아 좋아서 뛰었다

비록 보리밥이었지만 지긋지긋한 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그때의 기쁨은 어머니가

뒤에

 

"이제 오늘부터 쌀밥만 먹게 해주겠다"

하고 선포할 때보다 더 감격스러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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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춘궁기(보릿고개)가 닥치는 것은 가을에 벼를 추수하고 이듬해 보리를 추수 할 때 까지 겨울을 넘기느라고 농작물의 생장속도가 느려서 장장 7개월이나 걸리기 때문에 보리를 수확하기 직전에는 양식이 다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보리수확 할 때 까지가 고비다 하여 보릿고개라 한다. 벼농사에 비해서 수확량이 보잘것 없어도 보리를 수확하고 가을에 벼를 추수할 때까지는 기간도 짧지만, 여름이기 때문에 주곡인 벼와 보리 아니라도 여러 과일이며 채소 등 보조 양식이 많지만 겨울에는 모든 생물 성장이 멈추기 때문에 가을에 추수한 벼농사만으로 겨울을 버티어 나가야 하는데 비가 오지 않아서 모내기를 못 하면 가을에 추수할 주곡이 없어 겨울 자체를 넘기기가 힘들어지고 봄이 되면 아사하는 현상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래서 모내기를 제때에 할 수 있는 수리시설을 갖추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농업만으로 살아가던 그 시절 농민들에게는 춘궁기에 굶어 죽느냐 살아남느냐 하는 생사의 문제에 직결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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