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갑자기 운동장에 모이라는 비상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업을 시작하던 선생님도 어리둥절 하시면서 우리보고 일단 나가보라 하셨다.
영문도 모르고 운동장에 집합한 우리들을 향하여 단상에 등단한 학생회장 백 선배는 결의문을 읽어 나갔다.
".....학교 정화를 위하여 우리는 이러이러한 선생님들이 학교를 그만둘 때 까지 무기한 등교를 거부한다."
하는 결의문 낭독이 끝나자 마자 학생회 간부들과 규율부 3학년 선배들이
"야 빨리 집에 안 가고 뭐해" 하면서 우리들 전교생을 교문밖으로 나가도록 종용하기 시작했다.
이북서 월남하신 교장선생님은 생활력이 강한 이북출신 답게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강한 추진력을 가진 분이었다. 연혁이 짧은 우리의 중학교를 빠른 시일안에 명문교로 진입시키기 위하여 틈만나면 수업을 단축시키고 우리와 선생님들을 운동장 배수구 정비 사역에 동원 시켰고
학교 건설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보결생 허용 이라는 편법을 동원했다. 즉 한 학급 60명 정원에 보결로 20명 추가하여 80명 정원을 만들므로서 보결생이 추가된 우리 1학년은 완전 콩나물 교실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학급당 20명 보결생들의 등록금은 거의 학교발전에 쓰여졌을 테지만 4.19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학교징이 편법을 동원한 것과 마찬가지로 4.19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학생회장 직선제로 고조된 운동권 학생들의 위상을 높여서 편법을 동원한 학교측에 제동을 거는 학생운동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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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 등교길
우리마을의 하 선배를 위시하여
나의 초교 선배들은 중학교가 있는, 읍으로 통하는 큰 신작로 곰터 고개마루 정자나무 밑에서
신입생 우리들이 다 모일 때 까지 기다렸다가 5~60 명이 모이면 그 때 부터 까만 교복을 입은 우리 학생들 무리에
선배들이 선두에서서 발빠른 걸음으로 십릿길 속보가 강행되는데
신입생 우리들은 따라 걷지를 못하여 계속 뛰다시피 하였다.
선배들이 정확히 수업시간에 맞추도록 이렇게 단체로 후배 신입생들의 등교길을 같이하고
우리 신입생들이 즐겨이 단체로 선배들과 함께 했던 것은 사실 십릿길을 혼자 걷는 다는 것은 보통 고역이 아닌데다
당시 읍내 변두리에서 학교를 가지 못한 많은 악동들의 행패로
등 하교길의 신입생들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대 이후에는 대부분 버스로 통학을 하게 되었고
모두 중학교 정도는 진학을 하다보니 읍내의 무취학 악동들이 없어져서 선후배가 단체로
모여서 등교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당시 단체로 속보등교 하는 미풍때문에도 우리의 초교출신 선후배사이가 더욱 공고해져서
학생회장 선거때에 우리 초교출신 선배를 향한 강한 표의 응집력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 전교 학생회장 후보로
우리의 초교에서는 3 학년인 노선배와 백선배가 물망에 올랐고
2학년 부회장으로 우리마을의 손 선배가 천거 되었다.
뒷날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까지 지낸 노 선배는
그때 어쩐 일인지 백 선배에게 양보하는 쪽으로 결말이 났기 때문에
우리의 초교출신 전원은 백 선배를 미는 쪽으로 열심히 선거에 몰입했다.
학교 정문에서 신입생인 우리도 다른 초교출신 선배들의 눈총을 받아가며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백 선배의 선거 팜프렛을 돌리기도 했다.
선거전은 치열했다
특히 상대후보는 우리의 학군에서 최대 명문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1,2,3학년을 통털어 학교 규율부 출신들에게나 공부로 승부하는 학구파들에게나 지지 층이 제일 많았다.
(지금 따져보면 그 선배는 나의 장모님 친정집안 촌수로 가까운 분이었다)
그러나 백선배는 웅변선수 출신이었다.
그리고 키가 커서 멋있었기 때문에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중반 까지의 열세를
석동 뒷산 소풍가서 행한 마지막 유세전에서 여학생들의 몰표를 끌어내는 바람에 백선배가 신승했다.
그러나 치열했던 학생회장 선거의 후유증은 만만치 않았다.
교장선생님의 특명을 받고 보결입학을 주도했던 교무과장선생님이 우리의 초교출신이었으므로
따라서 백선배는 학교행정에 우호적이었다.
그 점을 꼬집어서
백선배의 상대후보 지지세력 들이 학교행정에 반기를 드는 바람에
부득이 백 선배는 전체 학생들의 동요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후 5월달에 일어난 5.16혁명 세력에 의하여
보결입학 책임을 지고 우리초교 출신들의 멘토, 교무과장선생님이 마산으로 전출을 가시게되었다.
선생님을 추방 하자는 학생운동의 후유증으로
미운 털이 박힌 선배 기수는 고교 진학성적이 형편없어서
노 선배도 재수를 해야만 경남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보결입학생 때문에 80명인 우리 기수는 도저히 공부가 안되어
3 학년이 되자 2개 학급이나 증원 인가가 난 1학년으로 부터 학급을 하나 빌려와서
우리기수를 4반에서 5반으로 늘리느라고 남녀 합반이 하나 탄생하였고
겸사하여 성적순으로 반을 편성하는 바람에
비판과 부작용이 속출하는 와중에서도 고교 진학성적 하나만은
타 기수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대한 기록을 갱신하게 되었다.
학생회장 백 선배는 대학다닐때던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ㅠㅠ
사진은 현제의 모교 전경
.
교가
-작사:설창수 작곡:임용춘
옛가야 비사벌의 살찐 들판에
화랑도 신라문화 꽃피던 고장
우러러 화왕산성 높이 받들고
새나라 새역사의 새길 닦는다
받딧불 눈빛아래 배운뜻 섬겨
어진스승 우리집 창녕 중학교
1.창녕중학교 교가 음원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어 대신 음원은 임시로
"나의 동창생"으로 대신 했습니다.
2.학생회장 백선배의 상대후보 선배가 나의 처외가집안(장모님 친정) 분이란 것을 언급하는 의미는
결코 그 선배를 뭣하기 위해서 쓴 글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 입니다.
3. 4월이면 늘 생각나는 기억들이지만 오래되어 기록이 정확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지나간 추억거리로 미소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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