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속의 미아가 될 뻔한 첫 딸애기의 추억
한 달 만이었던 것 같다
첫 딸애기와 떨어져 있었던 것이......
강변 저의 외갓집 모래마당에서 아장 아장 걸어 다니는 세살 백이를
멀리서 보는 순간, 한달이나 못 보았던 애틋함으로 가슴속으로부터 울컥하는
감정이 북받치면서 덥썩 안고 볼이라도 마구 부비고 싶은 마음에
처부모님에 대한 문안 인사는 안중에도 없이
“수경아” 하며 두 팔을 벌리고 딸애기 한테로 달려갔는데....
“아빠”하며 달려와 반갑게 안기리라는 기대와 달리
딸애기는 집안으로 종종 걸음을 쳐서는
자길 아는 체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마중 나오는 저의 외할머니 치맛자락 뒤에 숨어서
말똥말똥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었다.
아.....그때의 황당함 이란.....
2살 터울의 둘째를 낳고
애기 엄마는 산후가 아주 좋지 않았다.
하혈을 자주 하여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많다 보니
장모님이 오셔서는 장기간 산후 조리를 도와주고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멀리 강변에 있는 처가의 살림살이마저 따라 엉망이 되었으므로
집사람 몸이 완쾌 될 때 까지 3~6개월 정도
첫 딸애기를 저의 외갓집에 데리고 가서 돌봐 주기로 했다.
첫 딸애기는 외할머니가 많이 업어줄 거라는 말에 솔깃하여
엄마 아빠한테 빠이빠이 까지 하면서
기분 좋게 외할머니 따라서 강변 저의 외갓집으로 갔었는데.......
마이카가 없던 시절 강변은 너무나 먼 곳이어서
한달이나 지난 후에 딸 뇬도 볼 겸 산후조리에 애써주신 처부모님 문안인사차
들렸는데, 그 사이에 딸 뇬이 저의 엄마마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미아가 된 자녀를 찾아 헤메는 부모님 심정이 이랬을 거야
잘 자는 갓난 동생 애기를 꼬집어 놓고
갑작스런 애기 울음소리에 놀라 방에 들어가 보면
방구석 저쪽에서 이불 포옥 뒤집어쓰고 시침 뚝 떼고 있다가
살포시 이불위로 얼굴 내밀며 “내가 안 그랫쩌 내가 안 그랫쩌”
하며 눈웃음 살살 치던 첫 딸애기의 고 앙증스런 모습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억장이 무너진
집사람과 나는 밤새도록 딸애기의 기억을 살리기 위하여 안간 힘을 썼다.
“수경아 아빠다”
“수경아 엄마 여기 있네”.......
그러나 딸애기는 저의 외할머니한테서 떨어질 줄 몰랐고......
이러다가는 완전 딸애기를 잃어버릴 것이라는 위기감에
아무리 고생이 되더라도 죽으면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거지
내 가족 절대 떨어져 살 수 없다고 담날 딸애기를 당장 데려 가기로 작정을 했는데
이번에는 장인어른께서 못 데려간다고 거부를 하시었다.
집사람을 시집보내고 너무나 허전하시었나 부다.
그 와중에 외손녀의 재롱에 흠뻑 빠져 들다 보니.......
당신의 딸을 데려 갔으니
내 딸은 두고 가라는 의중이신지
거부가 너무나 완강하시어 결국 내가 양보를 해드릴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딸애를 데리러 간 건 아니지 만서두.......쩝
그러나
우리가 처가를 떠났던 그날 밤에
첫 딸애기는 동생애기,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살아나는지
밤새 울어 재끼기 시작하는데 저의 외할머니가 아무리 업고 달래어도 안 된다고
이번에는 장인어른께서 양보를 하시고 결국 담날 장모님이
첫 딸애기를 손수 데리고 우리 한테로 오셨다.
휴대폰을 여니까
미아를 찾는 멧세지가 무료 공익광고라 하며 뜹니다.
젊은 시절에 기억의 미아가 될 뻔한 가슴 쓰렸던 첫딸애기의 추억을 되씹어 보지만
자식의 생사도 모르는 부모님들의 심정에 어찌 비유를 하겠습니까.
이해도 저무는 년말에
가슴 아픈 부모님들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빌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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