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잣더니......
봉황은 어진 임금, 태평성대에 나타난다는 전설 속의 새 로서 벽오동 나무에 둥지를 튼다 했다.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 에서 보듯이 옛날 지방의 부자들은 사랑채를 지어 서울 과거보러가는 양반자제들이 편히 쉬어 가도록 침식을 무료로 제공했는데
사랑채를 거처간 손님이 과거에 급제라도 하는 날이면 그 인연은 그 부잣집의 든든한 인맥이 될 것이었고
또한 과년한 딸을 가진 부모는 그 사랑채로 인하여 근사한 사윗감을 만날 인연의 고리로도 기대 했음직 하다.
여기서 벽오동은 사랑채를 지칭함이고 봉황은 과거에 급제할 손님을 뜻 할 것이다.
어머니가 들려준 옛 이야기 중에
사랑채 주인이 보기에도 범상한 손님이 사랑채에 들려서 며칠간 신세를 지고 있었는데 그 손님이 하루는 밤에 잠이 안와 후원을 거닐던 중 후원의 별당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거문고 소리에 이끌리어 가지고 있던 피리로 거문고 음률에 화답을 하고 그렇게 하여 별당아씨와 손님간에 심오한 인연이 이루어진다.
그날 밤 사랑채 주인이 꿈을 꾸니 손님은 청룡이 되고 후원 별당에 기거하는 딸은 황룡이 되어 같이 하늘로 올라 가는 기라 잠에서 깨어난 주인은 이는 사랑채 손님이 예사 손님이 아닌 징표다 싶어 급히 사랑채를 들려다 보니 손님은 새벽에 이미 길을 떠나버리고 없었다.
귀한 손님이 사랑채에 투숙했는 데도 미처 알아보지 못하여 인적 사항도 물어보지 않고 제대로 대접도 못해 드리고 보내 버렸다고 주인이 탄식을 하니 별당 아씨인 딸이 그 손님 인연이 된다면 분명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의미있는 말을 하며 부모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곧 이어 난리가 나서 온 가족들이 화를 당했는 데 간신히 살아남은 별당 아씨는 손님이 준 정표를 가슴에 품고 피난길에 올라 손님의 친가를 찾아간다. 난리가 끝난후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고 귀가한 손님은 친가에서..... (신분을 속이고 어떻게 살았는 지 어머니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나네요 ㅋ) 자기를 기다리는 별당 아씨를 만나 행복하게 길이 잘 살았단다 하며
어머니가 벽오동을 심어 봉황을 보았다는 의미의 사랑채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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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숙명여대 1학년인 하숙집 건물 주인의 외동딸이
문수씨와 나에게 다정히 접근을 해왔다.
전에는
우리 또래의 바람둥이 하숙생 때문에
그 예쁜 여학생은 우리와 눈도 맞추어 주지 않았었는데......????
대구에서 건축업을 하는, 우리 하숙집 건물 주인은
외동 딸 서울 유학을 위하여
서울에 집을 한채 사놓고 어머니가 와서 밥을 해 주고 있었다.
1층은 딸과 함께 사용하고
2층은 우리 하숙집 아주머니한테 세를 놓아 하숙을 치도록 해주고 있었다.
경북여고 출신으로 알려진 딸의 어머니는
우리 하숙생들 한테는 가끔 마주치면 눈 인사정도만 할 뿐
일체 관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람둥이 때문에 딸에게는 하숙생들을 이방인 처럼 대하도록 교육을 시켰는데
그 예쁜 여학생이 우리들에게 다정히 접근을 해온다는 것은
그녀 어머니가 문수씨와 나를 예사로 보지 않게 되었다는 뜻인데.........
1주일에 3일간은 그룹과외를 문수씨가 맡아 하도록 해 준데다
군대 입대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남아
나는 같은 하숙생인 초등학교 선생님의 부탁으로
선생님과 둘이서
학교에서 지원하는 경비로
학생 발명전시회에 출품할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공고 기계과 나온 실력으로
도면을 그려서 가공소에 맡기고
선생님을 도와
발명 비스무리하게 작품을 만들어 내자
이 초등학교 선생님이 나를 대단하게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엣돈 한푼 도움없이, 대학생활을 멋지게 꾸려 나가는.....
하루 두시간만 과외하여 한달 1만 5천원을 버는 우리를 그렇게 부러워 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자기는
학생들 하루종일 가르쳐 봐야 월급이 1만 2천원 밖에 안된다고 푸념을 하면서......
그 초등학교 선생님이
문수씨와 나를 품행이 방정하면서 장래 유망한, 예사 대학생들이 아니라고
우리 하숙생들 사회에 극구 칭찬하고 다녔음이 틀림 없었다.
어느날
숙명 여대생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그리곤
군에 갈 때 까지 만이라도
자기의 여고 후배 동창의 아들 과외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숙명 여대생 어머니로 부터
내가 소개받은
경북여고 후배 아주머니에게는
고 2아들과 중3 딸이 있었고
남편은
고위직 공무원으로 승진 시험 준비한다고 서재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가
1주일에 3일간 고등학교 2학년 영어를 맡고 있었으므로
나는 1주일에 3일간 고2 수학 과외를 맡아 하게 되었다.
당시 그룹 과외할 때나 개인 과외할 때나 교재는 같은 것을 사용한 것으로 기억되고
따라서 미리 준비한다고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었는데
숙명여대생 어머니가 나를 어떻게 소개를 했던지
나를 대하는 분위기가 썩 좋았을 뿐 아니라
호기심 많은 중3 여학생이 잠옷 바람으로 우리 과외하는 방에 들락거리는 바람에
학생 어머니의 제지를 받기 까지 했다.
2개월이 채 안되었지만 입대 직전 까지 그 과외는 계속되었고
그래서
나는 고 2그룹 과외를 문수씨와 나누어 하느라고 1주일에 3일만 과외하고 좀 쉬긴 했지만
군에 갈 때 쯤에는 수학과외를 3일씩 두군데 맡아 1주일에 6일간 과외를 풀 했었고
괴외 수업비로 받은 돈은 입대해서 쓸 용돈을 빼고 모두 집에 드렸더니
형수님이 그렇게 좋아 하셨다.
난 사회에 나와 직장생활 하면서 번돈은 한푼도 집에 못 드렸지만
서울서 공부하면서는 돈을 벌어 집에 갖다 드린 샘이 되었다 ㅋ ㅋ
섬마을 선생님이던 문수씨는
도 장학사님의 배려로 갑자기 서울 유학길에 뛰어 드는 바람에 준비가 덜되어
지가 좋아하는 불어학과를 택하지 못하고
당시 인기가 없었던 중국어학과에 합격 했었다.
세월이 흘러
문수씨한테 유리할 것 같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중국과 교류가 활발해 져서 중국어학과 출신이 각광을 받는 시대가 왔다.
난
벽오동 나무였던 우리 하숙집에서
출중한 인물로 서울대학 중국어학과 대표까지 역임한 문수씨가
봉황 이 되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인터넷과
광주1고 출신을 상대로 문수씨 근황을 수소문 했으나
저명인사 인명부 어디에도 문수씨 흔적을 찾지 못했다.
문수씨가
아무래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신안군 섬마을에서 올라온 형님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던 걸 봐서는
경제적으로 매우 쫓기는 것 같아서
내가 하던 과외를 물려주기 까지 했는데........ㅜㅜ
반면 나는
군 입대만 안 했으면
숙명여대생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 거주 경북여고출신 사모님들 가정으로 과외교사 자리가 계속 연결될 수도 있었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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